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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추성마을 / 1954년 6.25 직후 불에 타 사라진 추성마을
추성마을은 우리나라 3대 계곡인 칠선계곡의 입구이지만 관광지로서는 화려하지 않다. 근래의 마을 형태는 1954년의 마을크기와 거의 비슷하고 새로이 들어선 펜션들이 주위에 포진해 있다. 수년전 백무동은 규제가 풀리자 마자 예전 허름했던 옛집들이 다 허물어지고 신식 건물과 펜션들이 들어 선 경우랑 추성마을은 사뭇 다르다. 2027년 칠선계곡 탐방로의 통행제한이 혹시라도 풀리게 된다면 6.25 전쟁으로 인해 초가집들이 전부 불에 타서 없어져 집터만 남아 있던 시절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번화한 마을이 될 것이다.
1954년 추성마을 / 1948년 추성마을
6.25전쟁 이전과 이후의 비교이다. 위의 사진에서 보이듯이 1948년(오른쪽) 들어차 있던 가옥들이 1954년(왼쪽)을 보면 6.25 전쟁 이후에는 집터만 앙상하게 남아 있다. 아마 소실된 듯 하다.
2017년 광점동 / 1954년 광점동
광점동으로 가보자. 광점동은 광주리를 파는 점포가 있었던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곳을 지나면 어름터골이 시작된다. 일제강점기 때 이곳은 '연로'라는 길이 있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지방도로급이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도로이며 조선시대 땐 이 길로 우마가 지나다닐 수 있었던 넓이다. 이 연로는 산청독바위 근처를 통과해 산청 유평리로 넘어간다.
조선시대에는 제법 험난한 이 길이 왜 필요했을까. 교역과 교류였다. 흔히 성황당이니 고갯마루니 하는 옛길을 대표하는 대명사는 험한 산을 에둘러서 가면 이틀, 삼일이 걸리지만 고개를 넘어가면 몇시간에 도달할 수 있는 이유로 고갯마루가 길이 되었고 그 여정의 무사안위를 위한 성황당이 생겼다.
특히 장마철이나 태풍등에 의해 금계앞 노디목이 떠내려가고 몇날며칠 강을 건너지 못할 때 추성리 사람들은 교역을 위해 험준한 지리산을 넘어 산청으로 갔을 것으로 예상한다. 물론 어름터 품개동으로 계속 농사 터전을 옮기다 보니 산청땅이 가까워서 지리산을 넘었을 이유도 있지만 어쨌든 간에 교역, 교류가 제법 많았다는 건 연로라는 길의 등급으로 보아 사실인 것 같다.
2017년 어름터 독가 인근 / 1954년 어름터 독가 인근
옛사람들은 지게에 감, 옻칠이나 딱종이, 숯 등을 메고 험준한 지리산 능선을 넘어간다. 이들은 캠핑 전문가들이었을 것이다. 나의 장인만 해도 소시적에 된장 한종지 쌀 한봉지, 코펠 하나만 들고 일주일간 지리산에 들어가서 약초와 나물을 캐와 화개장터에 팔았다고 한다. 또한 장인장모는 오래전 하동화개에서 출발해 천왕봉을 지나 쑥밭재에서 나물을 캐서 무게를 줄이기 위해 며칠동안 말려서 자루 몇개에 담아 가져왔다고 한다. 옛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2017년 어름터(구지도의 광점동)과 품개동 / 1918년 어름터(구지도의 광점동)과 품개동
현재 불리는 지명은 오인될 가능성이 극히 적다. 오히려 삼국시대때의 지명도 전해내려올 정도다. 그런데 1918년 일제가 만든 지형도엔 현재의 어름터 독가 인근이 광점동으로 표기되어 있고 현재의 광점동이 추성리로 표기되어 있다. 지금의 추성동은 아예 표기가 없고 두지동과 칠선동은 현재도 지명이 유지된다. 아래의 1918년 지형도를 보자.
1918년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 5만분의1 지형도
현재 사용되는 지명이 오인 될 가능성은 적기에 일제 육지측량부의 오류라고 보자. 흥미로운 점은 현재의 추성동과 두지동, 칠선동 보다 광점동(지도상 추성리(楸城里)) 어름터(지도상 광점동(筐店洞)) 품개동(品開洞)의 마을이 더 크다. 연로라는 큰길이 품개동 방향으로 형성되어 있는 이유도 이쪽의 마을들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연로에 마을이 형성되었을 수도 있다.
1948년의 항공사진을 보면 추성동(현재)을 비롯해 두지동, 칠선동, 광점동(현재), 어름터, 품개동의 농토들이 엄청 넓게 분포되어 있다. 두지동의 경우 창암산 능선까지 농토가 있고 그 넘어 강청리에서도 두지동 방향 능선까지 농토가 형성된다. 다른 마을들도 마찬가지다. 당시에는 농토를 만들 수 있는 곳은 다 만들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2017년 어름터(구지도 광점동)과 품개동 / 19154년 어름터(구지도 광점동)과 품개동
옛 마을은 물이 가까운 계곡(배산임수)에 형성되고 비옥한 농토간 거리가 멀어 이동이 불편할 경우 정착을 하게 되면서 생기게 되는데 이 마을들은 자연부락의 형태를 가지며 같은 혈연이나 지역 친구들이 모인 공동체일 가능성이 크다. 자연형성 마을은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형성하는게 아니다. 어름터와 품개동 역시 그런 형태로 마을이 형성 되었을 것이다.
2017년 마천면소재지 당흥마을 / 1954년 마천면소재지 당흥마을
위 사진은 마천면소재지인 당흥마을이다. 오른쪽 사진의 초가집 지붕들이 앙증맞다. 65년이 지나도 마을의 형태가 어떻게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나. 어떤 집은 초가 지붕만 바꾼듯 위치나 크기가 똑 같다. 가장 아래쪽 중앙부의 농지정리를 하지 않은 논은 그 형태마저 완전히 똑 같게 유지되어 있다.
이 사진에서 흥미로운 점은 당흥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검은색 선이 보일 것이다. 참호로 보였는데 그림자가 보인다. 아마 6.25 이후 빨치산과 접전을 벌였던 방어벽으로 추정된다.